전후 일본의 참여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인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이다. 열강의 식민지전쟁이 극에 달할 시기에 태어나 비극적 전쟁의 책임이 있는 나라의 국민으로 반전을 이야기하기까지, 참여지식인으로 '함께'이지만 '자유'로운 삶을 온 몸으로 온 삶으로 겪어낸 가토 슈이치.
양의 해에 태어나서 양의 노래라는 제목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떼를 짓지 않고 목동의 진가를 분간해 낼 수 있는 양이라니..
어린 시절부터 그가 주변인 혹은 객관적으로 상황과 사건을 바라보고 타자의 시선으로, 그러나 무책임하게 훈수를 두는 것이 아닌 깊은 통찰을 보여줄 수 있게 된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책을 읽으며 정말 이것이 어린아이의 시선이고 생각이란 말인가? 싶어진 대목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막연한 관계와 일상의 전개가 아닌 그 시간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유기적인 관계를 갖으며 자신에게는 혹은 상황에 어떤 의미로 해석되어질 것인가에 대한 사고가 세밀하고 밀도있게 전개된다.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지를 않더군요 " 수녀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마중 나온 어머니에게 특이한 사투리로 말했다. " 아무래도 낯을 가리니까요. 안나 수녀님. 곧 익숙해질 테죠"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냥 이대로 조금도 불행하지 않은데, 왜 다른 아이들과 친해지거나 그들 또래 집단에 끼거나 하는 일이 필요한 걸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결국 유치원 다니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그래서 다른 아이들 속에 존재하는 세상의 복잡함을 내가 발견하는 일도 없었다. (p47)
자서전이다.
스스로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며 정리한 글. 이렇게 치밀하고 구체적이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듯, 봄 볕에 덜 녹은 눈덩이가 스르륵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을 만큼 구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은 아름답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마치 쫀쫀하게 빈큼없이 짜낸 실크처럼 말이다.
그의 삶 전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며 그의 통찰과 고민과 경험과 유연하지만 강인한 신념을 이해할 근거가 되어준다.
이랬다면..그럴 수 있어. 라는 수긍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경험만이 최선의 증명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지성이 조롱당하는 시대. 돈과 권력이 사회와 사람들을 잠식해 오는 때,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은 묵직한 울림을 준다.
자신을 틀어쥐고 제 삶의 주인으로 살아내는 법.
억압과 고통 속에 찌그러지지 않도록 자신을 틀어쥐고 상황 속의 의미를 곰곰히 되짚어 행동할 수 있는 동력을 만드는 법.
사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가토 슈이치의 어린 시절의 상상을 초월하는 통찰에 내심 질투 같은 것도 생겼지만, 결국 그는 그 속에 무리짓고 안주하지 않는 자유로운 양이 되길 자처했지 않은가.
이 부드러운 강렬함과 예리한 아름다움을 아마 다시 읽어내고 싶어질 것 같다.
"이 천지간에는 너의 철학이 몽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 있다."(p543)"
훨씬 많은 것이 있다는 걸 알지만..알고만 있으니 내 몫의 경험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토 슈이치를 따라 걸은 긴 시간과 통찰의 길에 떨어진 양털처럼 주워모은 공감과 배움이 자유로운 삶에 썩 괜찮은 동력이 되어줄 것 같다.
잘 그려진 담채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